✝230222_수_340/365_로마서 1:11-12✝
[ 피차 안위함 ]
바울 선생님은 로마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정말 진정으로 만나보고 싶어 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뜻으로 여러분에게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열리기를 간구하고” 있었습니다(롬 1:10).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러나) 하나님의 뜻으로”라는 말입니다. 즉, 로마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래서 로마의 형제자매들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만이 “그들에게 나아갈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선생님은 로마에 가고 싶어 했으나,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그 뜻이 가장 좋은 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천하의 바울 선생님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로마에 갈 수 없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좋은 길이 열리기를 간구합니까? 좋아 보이는 길이 있다고 해서 덥석 그 길을 선택하지는 않습니까? 또는 반대로, 좋아 보이지 않는 길이라고 해서 그 길을 외면하지는 않습니까? 참으로 알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우리 눈에는 좋아 보이는데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거나, 또는 우리 눈에는 좋아 보이지 않는데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인 경우입니다. 이럴 때 저처럼 믿음이 약한 자는 일종의 딜레마에 빠집니다. 좋은 길을 택하든지 또는 좋지 않은 길을 택하든지, 하나님의 뜻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듯합니다).
우리가 바울 선생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 중 하나는 “하나님의 뜻으로(뜻 안에서)” 간구하는 것입니다. 좋아 보이든 좋아 보이지 않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중요함을 바울 선생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딜레마를 경험한 사람들은 바울 선생님의 이 믿음이 얼마나 견고하며 큰지 압니다. 왜냐하면 형제자매들의 믿음의 깊이와 넓이가 제 믿음의 깊이와 넓이와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남을 제가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을 갖는 데에는 비법이 없습니다. 굳이 비법이라고 하자면 꾸준한 믿음 생활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그 꾸준함이 말처럼 글자처럼 쉽지 않지만 말입니다.
바울 선생님이 로마의 형제자매들을 만나려고 하는 이유는 “어떤 신령한 은사를 그들에게 나누어주어 그들을 견고하게 하려는” 겁니다(1:11). 처음에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아하, 그렇지. 바울 선생님이니까 어떤 은사를(라도) 나누어줄 수 있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모두 인정하듯이, 천하의 바울 선생님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거장 앞에 서보신 적이 있습니까?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할 만큼 위대한 거장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영적인 거장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체에서 믿음이 출중한 형제자매와 대면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의 얼굴(과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기록을 이해할 만도 합니다.
“나누어준다”라는 말은 주로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무언가를 줄 때 쓰는 말입니다. 바울 선생님은 로마의 형제자매들에게 그들이 가지지 않은 것, 즉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고 싶어서 로마에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의 권위를 자랑하려고 가고자 한 게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신령한 은사로 “그들을 굳세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1:11). 다른 번역본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애타게 만나 보려는 것은 여러분과 함께 영적인 축복을 나눔으로써 여러분에게 힘을 북돋아 주려는 것입니다.”(1:11, 공동번역) 저는 “나누어주어”라는 말보다는 “나눔으로써”라는 표현이 더 좋습니다. ‘나누어줌’은 일종의 상하관계, 즉 수직관계를 더 의미하는 듯 보이지만, ‘나눔’은 일종의 동료 의식, 즉 수평적인 관계를 더 의미하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드디어 천하의 바울 선생님과 로마의 형제자매들이 만나 한자리에 모여있습니다. 영적인 축복이 바울 선생님으로부터 형제자매들에게 흘러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형제자매들로부터 바울 선생님에게 영적인 축복이 흘러 들어갑니다. 물론, 수학적으로 생각하면, 바울 선생님의 영력이 좀 더 높으니까(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울 선생님으로부터 로마의 형제자매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영적인 축복이 좀 더 크고 깊을 수도 있습니다. 부등호가 바울 선생님을 향해 열려 있다는 말이지요. 이런 상상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바울 선생님의 생각은 아닌 듯합니다. 설령 더 깊은 영성을 지닌 바울 선생님으로부터 로마의 형제자매들에게 영적인 축복이 더 많이 흐른다고 하더라도, 바울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곧 그가 그들 가운데서 그들과 자기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했기 때문입니다(1:12). 바울 선생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흘러나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과 그가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받고자 하는 겁니다(새번역).
우리는, 최소한 저처럼 믿음이 약한 사람은, 나보다 뛰어난 영성을 지닌 사람으로부터 영적인 축복을 받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믿음은 약하지만, 상대방의 믿음은 더 강하고 깊고 넓고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나 영성이 뛰어난 분들의 기도를 받으려고 줄을 섭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런 목사님이나 영성이 뛰어난 분들께 반기를 드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기도를 받으려는 이른바 일반 성도에게도 반기를 드는 게 아닙니다. 제발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그런 오해가 있다면, 우리는 이런저런 신앙 서적도 읽으면 안 됩니다.
바울 선생님은 로마의 형제자매들을, 비록 만나본 적도 없었지만, 너무나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에게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영적인 축복을 나누기 원했습니다. 경건한 분으로부터 신령한 은사가 일방적으로 흘러나오는 게 아니라, 서로 위로하는 관계, 서로 얼싸안고 슬픔과 기쁨을 나누는 관계, 바로 그 축복을 나누기 원했습니다. 부등호는 하나님만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등호 관계입니다. 물론 경건의 깊이에 따라 생기는 부등호를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리는 등호 관계입니다. 별을 단 장교나 갓 입대한 졸병 모두 예배당의 같은 의자에 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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