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5_수_333/365_데살로니가후서 2:13-17✝
[ 능동적인 수동 ]
바울 선생님은 데살로니가 형제(와 자매)들에 관해 하나님께 언제나 감사한다고 합니다(살후 2:13a). 질문입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그냥 잠깐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우리 주변의 형제자매들에 관해 하나님께 감사합니까?
바울 선생님이 감사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데살로니가 형제자매들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2:13b). 어떤 이는 의아해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뒤에 택하심을 입은 듯한데’라고 말이지요. 예, 교회에 출석해서 믿음 생활을 시작하는 것에는 순서가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그 순서는 우리가 편의상 갖다 붙인 순서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선생님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형제자매들을 처음부터 택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처음은 언제일까요? 데살로니가후서 2:13과 거의 평행을 이루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엡 1:4) 상상하시겠습니까? 세상 창조 전부터, 즉 창세기 1장 1절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순서와 하나님의 순서는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 개념 안에서 순서를 정하지만, 하나님은 영원이라는 개념에서 순서를 정하십니다. 아니, 영원이니까 순서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누구에게든지 믿음 생활을 시작한 시점이 바로 “처음부터”입니다.
바울 선생님이 감사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형제자매들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살후 2;13c).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 저절로 거룩하게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또는 거룩해져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시달리지는 않습니까? 바울 선생님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다”라고 말입니다.
예, 성경은 우리에게 “거룩하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거룩하게 되고 싶지만, 그게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되지 못하는 자신을 비하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애써도 잘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살후 2:13과 어울리는 고마운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주가 거룩하기 때문이다.”(레 21:8)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바울 선생님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다”라고 말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가(우리에게)] 진리를 믿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믿게 해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이성, 감정, 의지 등을 이용해 않으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반란을 잠재울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진리를 믿게 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 “[진리를 믿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의견이 없을 겁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지요. 이 문제만큼은 교회가 목숨을 걸고 가르칩니다.
바울 선생님이 데살로니가 형제자매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의 이 문단에서 강조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택함, 거룩하게 하심, 믿게 함, 그리고 구원에 이르게 함의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주도권은 하나님께서 행사하십니다. 아,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이 주도권에 도전하는지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역할은 철저히 수동적입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능동적으로 나서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행사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있기나 할까요? 바울 선생님의 권면을 들어볼까요?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든든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2:15)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든든히 서는 겁니다. 굳건하게 서는 것이지요. 이게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 혼자 설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말이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바울 선생님의 이 편지는 어느 개인에게 보낸 편지가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형제자매들에게, 즉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에 보낸 편지란 말이지요. 혼자 서기가 힘들면 공동체에서 도움을 받으십시오. 아니,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도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바울 선생님이 데살로니가 형제자매들(그리고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비록 나 혼자서는 힘들 수도 있지만, 형제자매와 함께라면 굳건하게 설 수 있습니다.
바울 선생님의 다음 권면은 그렇게 든든히 서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라는 겁니다. 전통이라고 해서 바리새인의 전통 또는 예전의 불합리한 전통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좀 쉬운 영어 성경은 “가르침(teaching)”이라고 번역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 말입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성령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바울 선생님은 그 가르침을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가르침을 받을 때 사람마다 받아들이거나 지키는 정도가 다릅니다. 어떤 이는 빨리 정확하게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받아들이거나 지키는 데 느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서로 이끌어주고 밀어주는 사귐 안에서 서로 함께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각자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 가고” 있었습니다(1:3).
택함, .거룩하게 하심, 믿게 함, 그리고 구원에 이르게 함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철저히 수동적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팔짱만 끼고 앉아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수동적인 우리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굳게 서서 가르침을 지키는 겁니다. 혼자 힘들면 공동체에서 함께 말이지요. 저는 그것을 ‘능동적인 수동’이라고 부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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